에드바르 뭉크의 <절규 The Scream>
뭉크(Edvard Munc, 1863-1944)는 몰라도 <절규>는 미술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도 한 번쯤은 접한 적이 있는 친숙한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광고, 영화, TV, 현대 미술 등에서 수없이 오마주되거나 패러디되면서 지금도 계속 재생산,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잘 그린 것 같지도 않고 거실에 걸어놓기에 어울리는 작품도 아닌 것 같은 <절규>가 세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널리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은 몹시 놀라거나 괴롭거나 분노하거나 두려울 때 비명을 지릅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이 극한 감정 상태를 뭉크가 완벽하게 표현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죽음, 질병, 불안, 공포 뭉크는 어린시절부터 이 네 단어와 매우 친숙했습니다. 5세가 어미니가 결핵으로 사망했는데, 14세 때에 누나도 어머니처럼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종교에 광신적으로 빠져들었으며 우울증과 분노, 환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남은 동생들도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며, 원래 허약 체질인 뭉크도 잦은 병치레로 결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어린 시절의 불행은 뭉크의 예술의 주제이자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는 류마티즘, 폐결핵, 기관지염, 뇌졸증, 총상, 열병, 스페인독감, 공황자애, 우울증 등 다양한 병을 알고 살아가야 했으며, 사랑에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뭉크에게 미술은 불안과 공포를 떨쳐내기 위한 몸부림이자 유일한 치유제가 되었습니다.
뭉크의 그림은 타인을 바라보는 관찰자로서가 아닌, 자기 경험과 고뇌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당시의 일상적인 풍경이나 종교, 그리스-로마 신화, 역사적 사건을 담기보다 자신이 겪었던 고독과 상실, 불안과 질투, 두려움과 무기력, 죽음과 질병에 대한 공포와 강박을 자서전처럼 그려냈습니다.
<절규>도 오슬로 에케베르그 언덕의 산책길에서 본 저녁노을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 무렵 뭉크는 첫번째 연인이었던 밀리 부인과 헤어지고 나서 극한 분노와 깊은 우울증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1892년 1월 22일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친구 둘과 함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한쪽에는 마을이 있고 내 아래에는 피오르드(Fjord, 노르웨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이 지형의 명칭으로 오늘날에는 관광지로 인기가 있음)가 있었다. 나는 피곤하고 아픈 느낌이 들었다..... 해가 지고 있었고 구름은 피처럼 붉은색으로 변했다. 나는 자연을 뚫고 나오는 절규를 느꼈다. 실제로 그 절규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진짜 피 같은 구름이 있는 이 그림을 그렸다. 색채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이를 통해 절규하는 주체가 뭉크가 아닌 자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림 속 주인공은 뭉크 자신인데, 각과 환청을 통해 자연의 절규를 듣고 깜짝 놀라 귀를 막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실제 하늘이 저렇게 핏빛으로 물들어 일그러지거나 사람이 저런 형상으로 보일 수도, 더욱이 자연이 그러한 비명을 지를 수는 없습니다. 이 작품은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장면을 그렸다기보다는 당시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던 뭉크의 불안하고 초조한 심리 상태를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절규>는 앞쪽에 인물이 배치되어 있고 그 뒤로 긴 대각선으로 이어지는 난간이 있어 시선이 자연히 앞쪽에서 뒤로 이어집니다. 화가가 “자연의 끝없이 긴 절규”라고 표현한 것처럼 마치 그 비명이 오른쪽 앞에서 왼쪽 뒤로 흐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모든 선들은 얼굴로 수렴하며, 다리의 직선들부터 피오르의 물결치는 파도까지 얼굴로 향하고 있습니다. 얼굴이 작품의 중앙에서 약간 벗어남으로써 관람자의 시선을 끌어모읍니다.
길고 날씬한 손으로 양쪽 귀를 감싼 채 동그랗게 뜬 눈, 넓은 콧구멍, 열린 입을 가진 중성의 해 모양 머리는 불안과 공포를 전달합니다. 양손을 귓가에 모으고 입을 벌린 모습은 절규를 지르는 것 같으며, 주변의 물결 모양으로 인해 그 절규는 더 증폭됩니다. 그림 속의 뭉크는 머리도 눈썹도 없는 모호한 모습은 불길한 의미를 더하고 있습니다.
저 멀리 다리를 따라 걸어가는 얼굴 없는 두 사람이 보입니다. 언뜻 보기에 그들이 멀리 걸어가는지 뭉크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뭉크의 설명을 통해서 그들은 뭉크가 겪었던 현상을 모른 채 걸어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뭉크는 색상을 통해서도 소리를 표현했습니다. 그는 피처럼 붉은색에서 절규를 본 것입니다. 그는 색상과 감정을 결합했는데, 노란색에서 슬픔을, 파란색에서 멜랑콜리(우울감)를, 보라색에서 부패함을 느꼈습니다.
이 그림이 처음 공개됐을 때, 이 그림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평론가들조차도 “그림에 대한 모독“이며 “정신병자가 그린 그림”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뭉크도 자신의 광기를 인정한 듯, 그림 상단 왼쪽에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것이다 ”라고 써놓았습니다.
하지만 훗날 <절규>는 세기말 인간의 공포를 표현한 최고의 걸작이란 명성을 얻게 되었고, 뭉크는 표현주의의 창시자라고 불리우게 됩니다. 정신 착란에 빠진 뭉크는 비명을 지른 것이 자신이었는지 자연이었는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연에 자신의 심리를 투영한 명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