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
독일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프리드리히는 무한한 자연 앞에 서 있는 인간을 주로 묘사했다. 그것도 인간의 뒷모습을 그렸다. 그는 회화를 통해서 창조주의 메시지를 암시하면서 감상자에게 장엄하고 신비한 자연을 통한 경외감과 숭고함을 불러일으키고자 하였다.
"너의 내면이 지닌 목소리에 정확히 귀 기울여라.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안에 있는 진정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예술의 유일하게 진실한 원천은 우리의 심장, 순수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감정의 언어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샘으로부터 솟아나지 않은 그림은 단지 인위적인 것에 불과할 것이다." - 프리드리히 -
1774년 9월 5일 그라이프스발트에서 태어남
1794년 코펜하겐과 드레스덴에서 미술학교를 다님
1801년 화가 필립 오토 룽에와 친분을 맺음
1802년 뤼겐의 풍경에 매료됨
1807년 소묘를 그만두고 유화 작업을 함
1808년 <산속의 십자가>와 <바닷가의 수도사> 완성
1818년 크리스티아네 카롤리네 봄머와 결혼
1819년 첫 딸 엠마 태어남
1824년 드레스덴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로 부임
1840년 5월 7일 드레스덴에서 사망
프리드리히는 당시 스웨덴 령이었던 발트해안의 항구도시인 그라이프스발트(Greifswald)에서 1010남매 중 여섯째로 출생했다. 7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6년 후에는 발트해에서 형과 스케이트를 타다 물에 빠진 그를 구하려던 형이 익사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런 체험으로 그는 어른이 되어서 우울증에 시달렸고 드레스덴에서 자살을 시도하시고 했다. 자살 시도 후 목에 난 상처를 가리기 위해 늘 턱수염을 기르고 다녔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엄격한 프로테스탄트의 교육을 받고 자라는 한편, 시인이자 목사인 코제가르텐(1758-1818)을 통해 자연은 신적 계시라는 영향을 받았다.
1794년 프리드리히는 유럽에서 가장 자유분방한 도시였던 코펜하겐의 왕립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고대 조각의 석고모형들, 그리고 모델과 자연을 소묘했다. 그 밖에도 폐허나 고대 신전 등을 택하여 수많은 소묘 습작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으로 자연을 관찰하여 이를 옮기는 테크닉을 익혔다. 이것은 후에 풍경화를 자유자재로 재구성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1798년 프리드리히는 드레스덴으로 이주하여 미술학교에 다녔지만 그곳의 교육은 그를 실망시켰다. 그는 미술관에 걸려 있는 작품들을 거부했으며 기존의 아카데믹한 화풍을 경멸했다. 대신 그는 독일의 산악지대를 여행하면서 많은 자연 풍경을 스케치했다. 프리드리히는 스케치 여행을 할 때 다른 사람과 동행하는 법이 없었다, 늘 혼자였다. 자연과의 만남은 화가의 은밀하고 고독한 행위였다. 자연과의 만남은 그에게 도처에 임재하는 창조주를 느끼고 창조의 생명력과 교감하는 행위였다,
1799년에 그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아카데미의 전시회에 출품했다. 1810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황태자가 베를린의 아카데미 전시회에서 그의 작품 <바닷가의 수도승>과 <떡갈나무 숲 속의 수도원>을 구입한 것은 그의 회화를 인정받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820년 이래에는 후에 니콜라우스 1세 황제가 된 러시아의 니콜라우스 대공이 프리드리히의 가장 영향력 있는 주문자가 되었다.
1818년 44세의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된 프리드리히는 그림의 색조가 밝아진 느낌을 주었다. 그림에 등장하는 상징적인 여인은 대부분 그의 젊은 아내를 모델로 하였다.
프리드리히는 작품의 내면세계를 중요하게 여긴 화가였다. 이러한 성향은 그의 독특한 화실 정경에서도 느낄 수 있다. 친구들조차 놀랐던 그의 화실은 너무나 텅 비어있어서 기이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고 한다. 방 안에는 이젤과 책상 하나, 그리고 의자 하나밖에 없었으며, 벽에 걸린 것이라곤 제도용 T자뿐이었다. 심지어 그림을 그릴 때 외엔 물감상자와 기름병 및 채료 헝겊조차 옆방으로 치워놓았다고 한다. 그는 모든 외적인 대상들이 그림의 내면적인 세계를 방해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화실은 글자 그대로 수도하는 은자의 명상실과도 같았던 것이다.
당시 바이마르에 거주하던 독일의 대문호 괴테(1749~1832)도 그의 그림에 매료되어 1810년 그의 화실을 직접 방문하기도 하였다. 프리드리히의 풍경화에 심취한 나머지 괴테는 풍경화를 배울 생각까지 했었다고 한다.
프리드리히의 그림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내면화되어 두운 색조가 강하게 드러나고 체념적이며 멜랑콜리한 정조를 보였다. 그로 인해 점점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외면당했다. 그는 끊임없이 창작에 몰두했으나, 1820년대 중반 이후로는 질병으로 인해 창작 생활에 많은 장해를 받았다. 그는 1835년 뇌졸증로 사지가 마비되었고, 1839년부터는 작업을 하지 못하였으며, 다음해 1840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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