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 여성 화가 베르트 모리조 Berthe Moriso

인상주의  여성 화가 베르트 모리조 Berthe Moriso
에두아르 마네 <제비꽃을 든 베르트 모리조> 1872년, 55.5x40.5cm, 오르세 미술관

  모리조는 1864년 23세에 국가 공식 전람회인 파리 살롱전에 처음 입선한 후 연이어 여섯 번이나 살롱전을 통과할 정도로 실력 있는 화가였습니다.


  파리 살롱전을 통해 데뷔한 실력 있는 화가였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제약을 받아야 했던 베르트 모리조와 그녀의 대표작 <요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베르트(Berthe Moriso, 1841-1895)는 부유한 집안의 네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궁정 회계위원회 수석고문이었고 프랑스 최고의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수여 받았으며, 어머니는 로코코 미술의 풍속화가 프라고나르(Jean Honore Fragonard, 1732-1806)의 증손녀였지요. 

어머니는 딸들에게 그림도구를 선물하며 아버지의 모습을 생일선물을 그리도록 한 것이 계기가 되어 미술을 배우게 됩니다. 모리조와 장녀 이브 그리고 차녀 에드마는 함께 미술수업을 받았으나 이브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해 그만두었습니다. 에드마와 모리조는 스승이 당황할 정도로 열정적이었습니다. 두 자매는 여러 화가들에게 개인 교습을 받으며 화가의 꿈을 키웠으나 안타깝게도 정규 교육은 받을 수 없었습니다. 여성은 전문 교육을 받는 것도, 전문 직업을 갖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두 자매는 약 10년 동안 함께 그림을 배우고 그리며 살롱전에도 입상하였지만, 아버지는 30세가 된 에드마를 해군 장교와 결혼을 하게 하여 화가로서의 경력이 마감되었습니다. 세 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에드마는 동생 베르트에게 종종 편지를 써서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상실감을 표현했습니다.

  에드마와 달리 베르트는 그림 그리는 것을 중단하지 않고 창작활동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여러 화가들을 알게 되었는데. 중요한 것은 마네(Edouard Manat, 1832~1883)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이후 베르트는 마네의 모델이 되어주기도 하면서 두 사람은 6년 동안 작업을 같이 했습니다. 마네의 영향으로 베르트의 그림은 경향과 주제가 바뀌어 일상생활의 장면과 초상화를 주로 그리게 됩니다.

  1874년 베르트가 33세 되던 해에는 드가의 권유로 인상주의 화가의 첫 전시회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에두아르 마네의 친동생인 외젠 마네와 결혼하게 됩니다. 그녀의결혼의 조건은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화가였던 외젠은 모리조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결혼 후에도 작품 활동을 지지했고, 결혼 전에 사용하던 서명 '베르트 모리조'를 그대로 사용하도록 배려했습니다. 그래서 모리조는 아이를 낳은 후에도 왕성하게 활동하며 평생 800 여점의 작품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베르트는 주변의 정원이나 풍경, 가족, 여가를 즐기는 모습 등 주로 친숙함과 따뜻한 감성을 느낄 수 있는 그림을 주로 그렸습니다. 그 이유는 여성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의 소재에 제약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남성 화가들이 발레리나, 세탁부, 술집의 댄서, 목욕하는 사람, 매춘부들을 주로 그렸는데, 여성인 모리조는 카바레, 카페, 바, 매춘 업소 등에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베르트의 그림은 유화임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맑고 투명한 느낌이 강했습니다. 파스텔 톤의 색상이 매력적인 분위기를 자아냈고, 화려하면서 미묘한 색채 구성에 있어서는 남다른 재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베르트의 그림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어떠했을까요?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한 유일한 여성이었던 모리조의 작품은 제대로 평가도 관심도 끌지 못했습니다. 그저 우아하고 고상하며 여성적인 그림이라는 평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트는 1879년부터 1886년까지 인상주의 전시회에 계속 참여하였습니다. 그녀의 재능은 남성 화가들에게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녀가 사망하기 4년 전인 1892년에는 모리조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고, 1894년 비평가 귀스타브 제프루아는 베르트를 위대한 세 명의 여성에 포함시켜 극찬하였습니다.

  베르트는 54세에 폐렴으로 사망하여 파리의 묘지 파시(Pasy)에 묻혀 있습니다. 그녀의 사망증명서의 직업란에는 '직업 없음'이라고 적혀있었지요. 그녀가 화가로 활동했을 때에도 파리의 국제조사서 직업란에 ‘직업 없음’이라고 기록해야 했습니다. 직업란에 ‘무직’이라고 기재할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의 현실은 여성의 사회생활이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여 씁쓸함이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