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은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의 생애 마지막 시점에 그려진 작품으로 그의 도피생활을 해야 했던 삶과 심리 상태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화가의 이름은 미켈란젤로. 하지만 동명의 어떤 위대한 천재 때문에 이 사람은 다른 이름을 써야 했다. 본명은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입니다. 'da'는 '~로 부터'(from)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로 번역하면 '카라바조에서 온 미켈란젤로'입니다. 하지만 100년 전 위대한 화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가 있었기에 일반적으로 그를 카라바조라고 부릅니다.
악마의 재능을 가진 화가로 불리우는 카라바조는 39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아가는 동안 음주, 폭행, 살인미수, 추행, 명예훼손, 탈옥 등 수많은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범죄후 다른 곳으로 도망을 해도 그의 뛰어난 실력 때문에 귀족들과 권력자들의 환심을 사서 어려움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교황마저도 작품을 원했을 정도였지요.
하지만 1606년 카라바조는 내기 테니스 경기를 하다가 라누치오 토마소니를 살해하고 로마를 떠나 도망하게 됩니다. 토마소니의 아내는 카라바조와 애정을 나눈 사이였습니다. 살인사건으로 카라바조는 모든 것을 잃고 사형을 선고 받은 수배자가 되어 이탈리아 전역을 떠돌게 됩니다. 나폴리, 몰타, 시라쿠사, 메시나, 팔레르모 등을 떠돌았으나 정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떠돌아야 했던 도피 생활은 카라바조를 더욱 난폭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4년 간의 힘든 도피 생활을 하면서 카라바조는 수많은 걸작을 그려내는데, 그중의 하나가 1610년에 완성한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입니다. 이 작품은 성경의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도피 생활 중 카라바조의 심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어두운 배경 화면에 오직 다윗과 골리앗만이 보입니다. 이런 기법은 원래 르네상스 시대 다빈치가 창조한 키아로스쿠(chiaroscuro, 밝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chiaro와 어둡다는 뜻의 oscuro의 합성어로 사실적인 빛과 그림자를 묘사하는 명암 처리법)입니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키아로스쿠로보다 더 극단적으로 명암 처리법으로 빛과 그림자의 대비시켰는데, 이를 어둠의 방식(tenebroso)이라는 의미에서 '테네브리즘'(Tenebrism)이라고 부릅니다.
다윗은 강렬한 빛을 받으며 골리앗의 잘라진 목을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죽은 골리앗은 이마에 큰 상처를 입고 있으며 눈을 감지 못한 채 입을 벌리며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 같네요. 이러한 골리앗을 바라보는 다윗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승리한 기쁨이 보이지 않습니다. 적장 골리앗의 못을 들고 승리의 함성을 외치는 영웅적인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골리앗을 바라보는 다윗의 눈빛에는 어떠한 감정이 느껴지시나요? 뭔가 심각한 것 같습니다.
카라바조는 작품 속에 종종 자신의 모습을 종종 표현하였습니다. 이 작품에 그려진 다윗과 골리앗 모두 카라바조의 자화상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다윗의 얼굴은 로마에서 교황과 추기경들의 사랑을 받으며 예술가로서 화려한 삶을 살았던 시절을 보여주고, 골리앗의 얼굴은 사람을 살해하고 추악한 범죄자가 되어버린 현재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살인 하기 전의 카라바조(다윗)가 범죄자가 되어버린 현재의 카라바조(골리앗)의 목을 베어버림으로써, 자신의 잘못된 과거를 반성하고 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는 것이 다윗의 칼날에 새겨진 'H AS OS'라는 문구입니다. 이 문구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St. Augustine, 354-430)가 시편에 대하여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예수가 사탄을 물리쳤듯, 겸손함으로 교만함을 무찔러야 한다"는 시편에 대한 주석입니다. 이런 내용 중에서 '겸손이 교만함을 무찌른다 Humilitas occidit superbiam'라는 부분을 'H AS OS'로 새겨넣은 것입니다. 어쩌면 카라바조는 교만으로 가득 찬 현재의 모습에서 벗어나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싶었던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카라바조는 자신의 회개와 반성을 표현한 담긴 이 작품을 자신의 조력자이자 교황의 조카인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에게 보내 사면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면 받을 것을 기대하며 발길을 로마로 향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로마에서 멀지 않은 작은 항구 도시 포르토 에르콜레에서 갑자기 사망하게 되어 공동묘지에 묘비조차 없이 묻히게 됩니다. 카라바조가 사망하게 된 원인으로 질병, 납중독, 종교기사단에 의한 암살 등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명확한 것은 없습니다.
39년이란 짧은 생을 살았던 카라바조의 극단적인 명암법(tenebrism)의 효과는 미술의 흐름을 크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연극에서 오직 주인공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어둡게 보이는 것처럼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비를 통하여 감정과 장면을 연출하는 그이 명암법은 널리 퍼졌습니다. 그의 작품을 본 화가들은 명암법을 흉내내며 카라바조에 열광했습니다. 빛의 화가로 알려진 네덜란드의 렘브란트는 카라바조의 명암법을 깊이 연구해서 자신의 독특한 양식으로 전개시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