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 The Duke and Duchess of Urbino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1420?-1492)
현대인들에게 <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은 낮설게 느껴지는 이 중 초화상(doppio ritratto)입니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우르비노 궁정화가는 아니었지만 페데리코의 공작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으며 궁정을 자주 방문했습니다. 그는 1465년 경 공작의 의뢰를 받아 독특한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이 작품은 위에서 보이는 것처럼 같은 배경이지만 왼쪽 여성과 오른쪽 남성이 따로 떼어져 있는데, 이렇게 두 판넬로 이루어진 미술 작품을 '딥티크(dypique)'라 부릅니다. 지금은 향수 브랜드로 익숙한 이름이지만.....
이 그림은 화려한 금장 액자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중간에 접을 수는 경첩을 달아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림을 접었을 때 다른 면이 보이는데, 이런 뒷면에도 그림을 그려 놓았습니다. 그래서 우피치 미술관은 이 작품을 벽에 걸어 놓지 않고 그림의 뒷면도 감상할 수 있도록 전시해 놓았다고 합니다.
앞면의 그림에는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은 우르비노 공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1422-1482)와 그의 아내 바티스타 스포르차(1446-1472)입니다. 남편은 최고 권력자를 상징하는 자주색을 입고 있으며 아내는 아주 화려한 옷에 머리띠와 머리 옆 장식, 목걸이, 옷의 무늬까지 그녀의 신분이 얼마나 고귀한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림 속 배경은 공작이 지배했던 곳의 풍경으로 지나칠 정도로 작게 그려진 반면 공작 부부는 화면을 가득 채워 존재감을 극대화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옆모습을 그린 것은 고대 로마 시대의 동전에서 그려진 인물들이 오른쪽을 바라보는 것에서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편인 페데리코가 오른쪽을 바라보도록 그려야 했는데, 반대로 왼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페데리코가 왼쪽을 바라보게 그린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페데리코는 우르비노의 백작 구이단토니오 다 몬테펠트로의 사생아였습니다. 전쟁에서 우르비노가 패하자 11세의 페데리코는 인질로 끌려갔으며 16세부터는 전쟁터에서 용병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용감한 장수였지만 안타깝게도 오른쪽 눈이 창에 찔려 실명했습니다. 한 눈으로 더 잘 볼 수 있도록 직접 칼로 콧등을 깎아 내렸다고 합니다.
22세의 페데리코는 전쟁과 기근으로 인해 거의 파산 직전에 놓여 있던 우르비노 공국을 물려 받아 국력을 회복하였지만 잔혹한 전쟁의 흔적들이 그의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화가는 페데리코의 얼굴에 난 사마귀나 점까지 그려 넣어 사실감을 더했습니다.
페데리코는 첫번째 아내가 사망하자 밀라노 스포르차 가문의 바티스타와 결혼했습니다. 그때 그녀의 나이 13세였습니다. 둘 사이에 딸만 내리 여섯 명이 태어난 후 마침태 아들도 얻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26세에 출산 중에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이 그림은 페데리코가 죽은 아내를 기리기 위해 의뢰한 작품입니다. 바티스타의 피부가 창백해 보일 정도로 하얀 이유는 당시 바깥일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귀부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지만,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존재라는 걸 암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여인의 이마가 상당히 넓은 편인데 당시 이탈리아에서는이마를 깨끗하게 드러내는 것이 유행이라 잔머리를 밀거나 불로 지질 정도였습니다. 당시 여성들의 초상화를 살펴보면 모두 이마를 드러내고 머리카락은 눈이 찢어질 정 도로 위로 높이 당겨 묶여져 있습니다.
이제 뒷면의 그림을 살펴볼까요?
뒷면에는 남편과 아내가 각각 마차를 타고 승전의 기쁨으로 만나는 장면이 그려져 있으며 기독교적인 상징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위치는 앞면과 반대입니다. 그렇다면 페데리코의 상처 난 얼굴이 보일까요? 아주 작게 그려졌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네요.
각각의 마차는 남편과 아내가 지녀야 할 도덕적 가치를 상징하는 요소들과 함께 꾸며졌다. 왼쪽의 공작은 갑 옷을 입고 백마를 몰고 있는데, 승리의 여신이 그에게 관을 씌워 주고 있고, 그의 앞에 있는 네 인물은 네 가지의 미덕을 상징합니다. 칼을 들고 있는 여인은 정의를, 부러진 기둥을 붙잡고 있는 여인은 꿋꿋함을, 다른 두 여인은 각각 신중함과 절제를 상징합니다.
오른편에서 부인은 순결을 나타내는 적갈색 유니콘이 모는 마차를 타고 기도서를 읽고 있습니다. 부인의 뒤에 있는 두 여인은 각각 순결과 겸손을 나타냅니다. 정면을 바라보고 십자가와 성체를 들고 앉아 있는 여인은 믿음을 상징하며 그 옆에 있는 다른 여인이 들고 있는 새는 펠리컨이다. 펠리컨은 조류 중 가장 모성애가 뛰어난 새로 커다란 부리에 먹을 것을 가져다 날라 주고, 먹을 것이 없으면 자신의 가슴을 쪼아 살을 뜯어 자식의 입에 먹을 것을 넣어준다고 하는데, 희생을 상징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보완합니다. 사실 남편은 아내와 정치와 행정 문제를 상의하였고, 남편이 전쟁에 나갔을 때에는 대신 통치를 했다고 합니다. 바티스타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여성에게도 교육을 시키는 스포르차 가문의 방침 덕분이었습니다.
그림 아래에 새겨진 라틴어 비문은 공작 부부에 대한 찬사를 새겨놓았습니다. 페데리코가 얼마나 존경받는 덕이 있는 장군이라는 것과 그의 아내가 얼마나 존경받는 부인이라는 것을 소개하는 문구입니다.
공작은 아내가 죽은 이듬해인 1473년 개인 도서관, 즉 '스튜디올로 Studiolo'를 세우고 인문학 공부에 열중했습니다. 말이 개인 서재이지 사실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서관으로 그가 막대한 비용을 들여 수집한 그리스 로마의 고대 필사본들로 가득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도 <회화의 원근법에 대하여>라는 책을 저술하여 공작에게 헌정했습니다.
그리하여 페데리코의 치세 동안 우르비노는 르네상스 시기 최고의 인문학 성지가 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