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침볼도의 <채소를 기르는 정원사 L’Ortolano>
16세기를 뛰어넘는 놀라운 창의성을 보여준 이탈리아 출신 아르침볼도의 <채소를 기르는 정원사 L’Ortolano>라는 작품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밀라노에서 태어난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 1526~1593)는 프라하에서 27년 동안 막시밀리안 2세(1527~1576)와 루돌프 2세(1552~1612) 아래서 궁정화가로 일했습니다. 궁정화가의 주요 업무는 왕실 가족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인데, 아르침볼도는 아주 파격적인 시도를 했습니다. 왕실의 근엄한 모습을 화폭에 담는 대신, 야채와 과일, 꽃으로 황제의 얼굴 형상을 조합해 황제의 얼굴을 묘사했습니다. 초상화는 실존 인물과 비슷하고 세밀하게 그려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과감히 깨버린 것이지요.
그의 대표작 <봄>, <여름>, <가을>, <겨울>이란 사계절 시리즈 작품은 <봄>은 여러 꽃들로, <여름>은 과일과 채소로, <가을>은 추수한 곡식들로, <겨울>은 잎이 떨어져 버린 나뭇가지로 황제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포스팅하겠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황제의 분노를 살 수 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황제가 웃음을 터뜨리며 환영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아르침볼도의 그림을 좋아했던 두 황제는 그의 그림을 유럽의 여러 궁정에 선물했지요. 자연스럽게 그의 작품은 전 유럽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습니다.
16세기를 살았던 아르침볼도가 어떻게 이런 기발한 발상을 했을까요? 아마도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맡아 일했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각기 다른 색과 모양의 조각들을 모아 새로운 형상을 만드는 것을 보고 자랐던 아르침볼도가 온갖 사물을 이용해 사람의 얼굴을 표현하는 놀라운 창의성을 보여준 것입니다.
소개해 드릴 <채소를 기르는 정원사 L’Ortolano>도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데, 이 그림은 한 그림이 2가지 형태로 보이는 아주 독특한 그림입니다. 얼핏 보면 괴기한 그림처럼 보이죠.
이 그림은 어떻게 걸어야 위와 아래가 맞는 것일까요? 그림의 제목이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화가는 분명 채소를 가꾸는 정원사를 그렸기 때문에 인물화입니다. 채소를 기르는 정원사의 얼굴이 양파, 무, 당근, 마늘 같은 뿌리채소, 치커리 같은 잎채소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툭 튀어나온 광대뼈는 양파, 높은 코는 길쭉한 당근, 붉은 입술은 포개진 버섯으로 선명하게 묘사했습니다.
하지만 위와 아래를 180도로 뒤집어 보면 채소들이 가득 담긴 정물화가 됩니다. 채소로 사람의 얼굴을 표현했다는 데서 놀라고, 그림의 위아래를 뒤집으면 인물화가 정물화가 된다는 데서 또 한 번 놀라게 됩니다.
이렇게 아르침볼도는 사물의 여러 가지 형태나 표면에서 사람의 생김새를 찾아내어 익살스러운 작품을 남겼습니다. 아르침볼도가 사망한 뒤 그의 그림은 잠시 잊혔다가 20세기에 다시 관심을 받게 되고, 스페인의 살바도르 달리 같은 초현실 세계를 그리는 현대 화가들에게 자극을 주었습니다. 또한 오늘날에는 아이들에게 상상력과 창작력을 키워주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